학습동기

삶에서 스스로를 지탱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철학이라고 믿어요. 개발자로 살면서 나의 방향과 성장이 팀에게 도움이 되는가? 부터 내가 받는 존중과 성취가 합당한가? 까지 모든 것들이 철학에 근거하여 나에게 불안으로 다가오기도하고, 만족이나 행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근래에 크게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알랭드 보통의 생각이 궁금하여 해당 챕터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책 내용이 발췌되어 있기도하고, 제가 각색한 내용이 담겨있기도 해요! 취사하여 습득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존심이란?

우리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우리도 성질 급하게 결투에 나서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결투란 지위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예민한 감정적 대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욕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 생각을 지배한다. 스페인어로 데스 온라도는 ‘불명예를 당한 자’ 라는 뜻 이지만 그 현대적인 함의는 섬뜩할 정도로 강한 경멸이 담긴 말인 ‘패배자’ 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칼데론이나 로페 데 베가의 비극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괴롭힐 수 있다.

지위를 부정당할 때, 예를 들어 일에서 어떤 목표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구성원과 똑같이 괴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철학과 약점의 극복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아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 에픽테토스

기원전 5세기 초 그리스 반도에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지위로 인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는 턱수염을 기른 사람이 많았다. 이 철학자들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낮은 지위로 인한 심리적, 물질적 결과에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모욕이나 비난이나 빈곤 앞에서도 늘 차분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에 금과 보석을 잔뜩 매단 행렬이 지나가자 이렇게 소리쳤다. 봐라. 내가 원치 않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코린트를 지나가다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갔다. 디오게네스는 누더기를 입고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며 무일푼의 신세였다.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그렇다고 이 철할자들이 친절과 조롱, 성공과 실패를 구분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방정식 가운데 어두운 반쪽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이 방법은 전통적인 명예 규범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였다. 이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으 ㄹ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성의 규칙을 따르면 주어진 결론을 타당성 있는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을 경우에만, 오직 그런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된다. 철학자들은 수학이 훌륭한 사고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윤리적인 생활에서도 수학의 객관적인 확실성에 준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공동체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은 것이라면 공동체의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망상에 사로잡혀 2+2 는 5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흔들릴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던 황제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품위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좌우되지 않는다. 철학자 황제는 그런 주장으로 명예에 기초하여 사람을 평가하던 당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는가?” 에메랄드가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진다더냐 ? 금, 상아, 작은 꽃 한송이는 어떤가 ??

칭찬 받고 싶다는 욕구에 빠지지말고, 모욕을 당했다고 괴로워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출발하여 자신을 파악하라고 권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멸하는가?” 경멸하라고 해라. 나는 경멸을 받을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이나 질책이 무조건 근거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가치 평가를 지적인 양심에 맡기는 것은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결점이 있든 우리를 높이 평가하는 부모나 연인과는 달리 철학자는 사랑에 계속 기준을 적용한다. 다만 세상이 흔히 적용하는 변덕스럽고 비합리적인 기준이 아닐 뿐이다. 지적인 양심이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더 가혹해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이런 불의가 벌어질 경우, 우리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후광 없이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안 덕분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한다면, 이런 점과 관련하여 다른 감정들의 쓸모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상태나 소유를 선망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진정한 요구와 관련이 없는 야망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수도 있다. 이런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르는 오류를 범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한 뒤, 지혜로우면서도 침착한 중도를 이상으로 제시하면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중도에 이르는 것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한다고 말했다.

철학적 이상  - 용기 관대함 - 온화함 - 재치 - 친근함

지적인 염세주의

우리 행동에 대한 근거 있는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야망에 대한 불안감 표시에 주의를 하고, 우리의 실패에 대하여 적절한 책임감을 느꼈음에도, 그래도 계속 공동체로부터 낮은 지위가 부여된다면, 우리는 서양 전통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몇 사람이 보여주었던 접근 방법을 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주위의 가치체계의 삐둘어진 곳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여 지적인 염세주의의 자세를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방어하려는 태도나 오만하게 구는 태도와 거리가 멀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드르이 의견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면서 서글픈 동시에 묘하게 위안이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야기해왔다 어떤 문제이든 다수의 의견에는 혼란과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샹포르는 그의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의 철학자들의 염세적 태도를 반영하여 이 점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이렇게 여론에 결함이 있는 것은 공중이 이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엄격하게 검토하지 않고, 직관, 감정, 관습에 의존해버리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생각, 어디서나 받아들여지는 관념은 어리석은 것이라도 믿어도 좋다. 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샹포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흔히 아첨을 하듯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게 언어도단에 가깝다고 덧붙인다. 단순화와 비논리, 편견과 천박함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유럽인이 남아프리카 호텐토트 사람들에게 왜 메뚜기를 먹고 몸에 붙은 이를 삼키느냐고 물었을 떄 그들도 바로 그런 말을 했다. “그것이 전통이오”

여론의 빈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깨달음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불안,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은 피곤한 욕망, 사랑의 표시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갈망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철학적인 접근 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천박함이냐 외로움이냐는 선택해야하는 사항 중 하나이다. 모든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의 경우 한동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살아보면 학교 선생들이 그들을 둘러싼 아이들의 거칠고 시끄러운 놀이에 별로 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게 된다. 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해서 벗을 사귀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단지 현재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반영할 것일 뿐이다. 냉소 주의자들은 단지 불편할 정도로 기준이 높은 이상 주의자들일 뿐이다. 샹포르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사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가끔 말하는 경우가 있다 “ 이것은 밤에 봉디 숲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산책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사실 우리의 지위를 단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론적으로는 우리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과 결투를 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야하기 때무이다. 대신 우리는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껴야하는데, 사실 이떄 느끼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느낀점

타인에게 인정받고, 지위를 얻고 싶은건 너무 지극히 당연한 욕망이고 나의 자존심은 외부의 인정으로부터 나오는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를 빛나지 않는다고 질타한들, 그 다이아몬드에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에 대한 행동과 환경에 대해서 질타하지 않고, 스스로가 의미 부여를 해주자.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그 가치를 인정 받으며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다. 그리고 타인에게 받은 인정보다 스스로가 해주는 인정에서 오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철학이 삶에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때때로 너무 쉽게 변하는게 철학이라 그 힘이 있다한들 얼마나 클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며 맞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철학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외압에 의해 흔들릴 때 철학을 가지고 내 갈길을 가며 그 과정에서 깨달음과 성취감. 행복감을 느낄 때 삶의 만족도가 올라간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인해 철학이 바뀌어 가는 것 또한 건강하고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